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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뱀파이어 영화라고 알고 들어갔는데 한참을 봐도 뱀파이어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신작 <씨너스: 죄인들>은 공포영화인지, 음악영화인지, 시대극인지 한 마디로 설명이 안 되는 영화였습니다. 그 이유를 직접 보고 난 뒤에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뱀파이어는 언제 나와? — 초반 30분의 함정
제가 처음 이 영화를 켰을 때 든 생각은 딱 하나였습니다. "뱀파이어 나온다던데 왜 아직도 안 나오지?" 스모크와 스택 형제가 시카고 갱단을 배신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밀주와 무기를 챙겨 선술집, 이른바 주크 조인트(Jook Joint)를 차리는 과정이 꽤 길게 이어집니다. 여기서 주크 조인트란 20세기 초 미국 남부 흑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음악을 즐기던 비공식 사교 공간으로, 당시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 아래 흑백 시설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던 시대에 흑인들만의 해방구 역할을 했습니다.
짐 크로우 법이란 19세기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미국 남부를 중심으로 시행된 인종 분리 법률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식당, 화장실, 대중교통 모두 백인용과 흑인용이 따로 있었고, 이 영화의 배경인 1930년대 미시시피는 그 차별이 가장 노골적으로 남아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처음엔 술집 하나 열려고 이렇게 오래 보여줘야 하나 싶었는데, 다 보고 나니 이 시간이 없었다면 뒤에서 누가 죽을 때 아무런 감흥도 없었겠다 싶었습니다.
마이클 B. 조던이 쌍둥이 형제를 1인 2역으로 연기한다는 사실은 알고 들어갔지만, 보다 보면 정말로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옵니다. 얼굴은 똑같은데 눈빛이나 말투, 태도가 조금씩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같은 배우라는 게 계속 신경 쓰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스모크하고 스택을 보고 있었습니다.
"더 신" 장면 — 음악이 시대를 넘어서는 순간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을 하나만 고르라면 단연 블루스 연주자 샘이 기타를 치는 그 장면입니다. 평론가들이 '더 신(The Scene)'이라고 따로 부를 만큼 이야기가 많이 나온 부분입니다. 처음에는 1930년대 사람들만 있는 공간인 줄 알았는데 음악이 이어지면서 갑자기 시대가 섞입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한 공간에 나타나 같은 음악에 빠져드는 장면이었습니다.
처음엔 "뭐지, 영화가 이상해졌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근데 보고 있으니까 멋있었습니다. 그냥 한 가수가 노래 잘 한다는 게 아니라, 이 음악이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끊기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걸 한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영화에서 음악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는 건 제가 거의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장면의 음악 장르가 바로 델타 블루스(Delta Blues)입니다. 델타 블루스란 20세기 초 미시시피 강 삼각주 지역에서 탄생한 블루스의 원형으로, 미국 대중음악 전반의 뿌리가 되는 장르입니다. 록, 재즈, 소울, 힙합 모두 이 흐름 위에 놓여 있다는 게 음악사학자들의 공통된 설명입니다(출처: Smithsonian Magazine). 영화는 이 사실을 대사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저 한 장면으로 그냥 보여줍니다. 그게 더 세게 남았습니다.
영화 음악은 결국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했고, 이 장면을 포함한 음악 연출 덕분이라는 평이 많습니다. 별로라는 후기에서도 촬영과 음악만큼은 좋았다고 한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저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확실히 알겠었습니다.
이 뱀파이어들은 왜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보는 걸까
뱀파이어가 등장하고 나서 제가 가장 신경 쓰였던 건 이겁니다. 왜 저 덩치 큰 것들이 그냥 문을 안 부수고 밖에서 기다리는 걸까. 처음에는 솔직히 좀 웃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보다 보면 이 설정이 단순한 뱀파이어 클리셰가 아니라는 게 보입니다.
이 영화의 뱀파이어들은 무조건 달려들지 않습니다. 대장 레믹(잭 오코넬 분)은 문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우리하고 같이 있으면 외롭지 않다고, 다 같이 하나가 된다는 식으로 사람을 꼬십니다. 잠깐은 저게 그렇게 나쁜 건가 싶을 정도로 말이 됩니다. 이 구도가 제국주의적 동화 논리와 닮아 있다는 분석이 있는데, 지배하는 쪽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피지배자 스스로 문을 열게 만드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집 안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거주자의 초대가 필요하다는 뱀파이어 설정이 바로 그 비유입니다.
영화 속 아일랜드인 캐릭터들이 뱀파이어 무리에 합류하는 배경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아일랜드 이민자들 역시 심한 차별을 받았고, 그 상처를 가진 이들이 '우리는 하나다'라는 논리에 넘어가는 구도가 만들어집니다. 차별받는 존재들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세력을 키우는 뱀파이어라는 설정이 이 영화에서는 단순 공포 장치가 아니었습니다.
아래는 이 영화의 뱀파이어가 일반적인 뱀파이어 영화와 다른 점들입니다.
- 물리적 폭력 전에 반드시 언어적 설득과 유혹을 먼저 시도한다
- 집 안에 들어오기 위해 거주자의 명시적 초대가 필요하다
- 인종·계층적으로 소외된 존재들을 타깃으로 공동체 논리를 내세운다
- 단순히 흡혈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는 것이 목표다
스택과 스모크, 같은 얼굴의 다른 선택
제가 쿠키 영상을 보고 나서야 이 영화가 완전히 끝났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본편 마지막보다 쿠키 영상이 더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늙은 샘 앞에 뱀파이어가 된 스택이 다시 나타나는 장면인데, 그날 밤이 샘한테는 평생 전의 기억인데 스택한테는 바로 어제 같은 일처럼 느껴질 것 같았습니다. 좋은 기억하고 끔찍한 기억이 같은 밤 안에 함께 있다는 게 묘하게 불편하고 또 묘하게 슬펐습니다.
스택은 결국 뱀파이어 편에 합류하고, 스모크는 흑인으로서 끝까지 저항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얼굴이 똑같은 형제가 왜 완전히 다른 길을 가는가. 스택 쪽 선택이 처음엔 이해가 잘 안 됐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그게 배신이 아니라 그 사람 나름의 피로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별받는 현실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느냐는 질문을 두 형제가 각자의 방식으로 대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이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6개월 만에 촬영과 편집을 마쳤습니다. 할리우드에서 오리지널 시나리오, 즉 기존 IP(지식재산권)나 원작 없이 처음부터 만든 이야기로 이 정도 규모의 상업영화를 만드는 일은 갈수록 드물어지고 있습니다(출처: Variety). 아카데미 16개 부문 후보에 오른 것도, 결국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얼마나 단단하게 짜여 있었는지를 방증하는 결과라고 봅니다.
흑인이 주체적으로 흑인의 역사와 정체성을 그린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높게 평가하는 시각도 있고, 메시지가 너무 많아 산만하다는 쪽도 있습니다. 저도 보면서 좋았다가 좀 과하다가 다시 좋았다가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몇 장면이 너무 세게 남아서 결국 좋았던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씨너스 뱀파이어 나오는 게 너무 늦지 않나요?
A. 저도 처음에 그 생각을 했습니다. 초반 30분 넘게 뱀파이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아 공포영화를 기대한 분들은 답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인물 관계와 시대적 맥락을 쌓는 과정이라, 다 보고 나면 오히려 그 부분이 없었으면 감정이 훨씬 얕았겠다 싶어집니다. 두 번째 볼 때 앞부분이 더 좋았다는 후기가 많은 것도 그 이유라고 봅니다.
Q. 마이클 B. 조던 1인 2역 구분이 되나요?
A. 처음엔 둘 다 같은 얼굴이라 살짝 헷갈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다 보면 스모크는 묵직하고 스택은 조금 더 충동적인 느낌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구분이 됩니다. 제 경우엔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어느 쪽인지 확인하려는 노력 자체를 안 하게 됐습니다.
Q. 씨너스 쿠키 영상 꼭 봐야 하나요?
A. 쿠키 영상이 두 개 있는데, 특히 마지막 쿠키가 중요합니다. 늙은 샘과 뱀파이어가 된 스택이 다시 만나는 장면으로, 본편에서 열어둔 질문에 대한 감독의 마지막 대답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오히려 이 장면이 본편 엔딩보다 더 오래 남았습니다.
Q. 흑인 역사나 블루스를 모르면 이해가 어렵나요?
A. 저도 델타 블루스나 짐 크로우 법을 깊이 알고 본 건 아닙니다. 그래도 영화 안에서 보이는 것만 따라가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배경 지식이 있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장면들에서 훨씬 많은 게 보일 것 같았고, 그래서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론
다 보고 나서 뱀파이어보다 음악이 먼저 생각났습니다. 이게 저는 솔직히 좀 의외였습니다. 뱀파이어 공포영화를 기대하고 들어갔는데 끝나고 기억나는 건 기타 치는 샘과 주크 조인트 안에서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부분이 다 좋았다고 하기는 어렵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중간중간 하나에 더 집중해줬으면 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장면이 너무 강하게 박혀서 결국 좋았던 영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엄청 무서운 공포영화를 원한다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르가 섞이는 게 불편하지 않은 분, 음악 장면 하나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분이라면 한 번 보실 만합니다. 저는 특히 앞부분을 기다림 없이 다시 보고 싶어서 재관람을 생각 중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live/Au4JvpZvYCE?si=hjZgbOZ6B4V9ke2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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