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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남자들이 지하실에서 치고받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틀었더니 주인공이 잠도 못 자고 암 환자 모임에서 혼자 울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이미 예상이 다 빗나갔는데, 이상하게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파이트 클럽이 왜 25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지, 직접 보고 나서야 조금 이해가 됐습니다.

불면증으로 시작하는 영화, 싸움 전에 뭔가 더 있지 않을까요
파이트 클럽의 주인공은 만성 불면증(Chronic Insomnia)에 시달립니다. 여기서 만성 불면증이란 단순히 잠을 못 자는 것을 넘어, 수면 장애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감정 조절과 현실 인식 자체가 무너지는 상태를 뜻합니다. 실제로 출처: WHO(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수면 장애는 우울증, 불안 장애와 밀접하게 연결되며 현실 감각 저하를 유발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 설정을 통해 주인공이 나중에 다중인격 상태에 빠지는 것을 꽤 설득력 있게 깔아둡니다.
제가 이 도입부에서 처음 눈길이 간 건 주인공이 회사 자리에 멍하게 앉아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거기에 아픈 사람들 모임에 나가서 낯선 사람들과 껴안고 웁니다. 아픈 것도 아닌데 왜 저러나 싶었는데, 알고 보면 그게 유일하게 감각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던 겁니다. 그 설정이 생각보다 꽤 슬펐습니다.
그러다 말라(Marla Singer)가 등장합니다. 말라는 자신도 아프지 않으면서 지지 모임을 전전하는 인물입니다. 주인공 입장에서는 자신과 똑같은 사기꾼이 나타난 셈이라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처음에 말라가 그냥 이상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반전을 알고 나서 말라가 했던 말들을 다시 떠올려보니 오히려 말라 쪽이 훨씬 정상이었습니다. 이 여자 입장에서는 주인공이 더 이해가 안 됐을 테고, 그 생각을 하니 말라가 좀 불쌍해지기도 했습니다.
다중인격이라는 반전, 알고 봐도 다시 보고 싶은 이유가 있을까요
타일러 더든(Tyler Durden)은 비행기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하는 인물인데, 하는 말마다 자신만만하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주인공보다 타일러가 훨씬 재밌었습니다. 저렇게 살면 속이 편하겠다 싶다가도 둘이 살고 있는 집 꼴을 보면 저기서는 하루도 못 버티겠다 싶었습니다.
둘이 처음 주먹질을 주고받는 장면은 솔직히 좀 웃겼습니다. 왜 서로 때려달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구경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합류하면서 파이트 클럽이 만들어집니다. 여기까지는 저도 꽤 재밌게 봤습니다. 얼굴 퉁퉁 부어서 출근하는 장면도 웃기고, 파이트 클럽이 주는 해방감이 뭔지 조금은 이해가 됐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모이면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여기서 집단 심리(Group Psychology)라는 개념을 생각해볼 만합니다. 집단 심리란 개인이 집단 속에 녹아들면서 독립적 판단 능력이 약해지고 집단의 방향에 무비판적으로 따르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자유롭게 살자고 모였던 사람들이 다 똑같이 머리를 밀고, 타일러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입니다. 타일러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던 획일적 시스템을 그대로 복제한 겁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타일러가 처음으로 싫어졌습니다.
사라진 타일러를 쫓아다니던 주인공에게 파이트 클럽 회원들이 "타일러"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저는 잠깐 영상을 멈추고 앞 내용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쉽게 말해 한 사람 안에 두 개 이상의 독립적 인격이 공존하는 상태인데, 주인공과 타일러가 바로 그 관계였던 겁니다. 이걸 알고 나서 말라가 주인공에게 했던 말들이 전부 다시 보였습니다. 반전을 알고 다시 보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된다는 말이 왜 나오는지 그제야 이해했습니다.
- 타일러가 실제로 화면에 등장하는 장면과 그렇지 않은 장면을 다시 구분해서 보면 복선이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 말라가 주인공에게 이상하게 반응하던 장면들이 반전 이후에 전부 다른 의미로 읽힙니다
- 반전을 이미 알고 첫 시청한 관객들도 "그래도 볼 만했다"는 후기가 많을 만큼 구조 자체가 탄탄합니다
앞부분은 좋았는데, 결말까지 다 좋았냐고 묻는다면
저는 솔직히 파이트 클럽이 지하실 몇 명이서 싸우던 시절이 제일 좋았습니다. 뒤로 갈수록 규모가 너무 커집니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들끼리 주먹 한 번 맞대는 게 전부였는데, 나중에는 도시 전체 건물을 날리려는 프로젝트 메이헴(Project Mayhem)으로 번집니다. 여기서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고,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멀리 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밥이 죽는 장면도 그렇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 사람들이 좀 과격하게 노는 건가 싶었는데, 이름도 없이 움직이던 사람이 진짜 죽습니다. 그리고 죽고 나서 갑자기 이름을 외쳐주는 게 이상하게 더 불편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디까지 가려는 건지 그 장면에서 처음 불안해졌습니다.
타일러가 손에 강알칼리성 용액을 붓는 화학 화상(Chemical Burn)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학 화상이란 강산이나 강알칼리가 피부에 닿았을 때 조직을 빠르게 파괴하는 부상으로, 즉각적인 냉각 처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타일러는 고통을 그냥 버티라고 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물에 씻어주면 되는데 왜 저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났습니다. 타일러의 메시지가 멋있게 포장돼 있더라도, 그게 다 맞는 말처럼 받아들이면 위험하다는 걸 이 장면이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 영화는 데이비드 핀처(David Fincher) 감독이 척 팔라닉(Chuck Palahniuk)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1999년에 만든 작품입니다. 출처: Rotten Tomatoes에서 현재 평론가 점수 79%, 관객 점수 96%를 기록하고 있는데, 개봉 당시에는 기대만큼 반응이 좋지 않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재평가된 경우입니다. 여러 번 다시 보면서 새로운 걸 발견한다는 반응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파이트 클럽 반전을 미리 알고 봐도 재밌나요?
A. 반전을 알고 봐도 재밌다는 후기가 꽤 많습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주인공과 타일러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보면 감독이 숨겨둔 복선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말라가 주인공에게 이상하게 반응하던 장면들이 전부 다른 의미로 읽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물론 처음 보는 것보다 두 번째 시청이 덜 재밌었다는 사람도 있어서, 이건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Q. 타일러 더든이 주인공과 같은 사람이라는 게 처음부터 암시돼 있나요?
A. 네, 영화 곳곳에 복선이 숨어 있습니다. 타일러가 화면에 순간적으로 등장하는 장면들, 말라가 주인공을 대하는 방식, 둘이 같은 공간에 동시에 없다는 점 등이 단서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게 되는데, 알고 나서 다시 보면 감독이 꽤 치밀하게 배치해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Q. 파이트 클럽은 원작 소설과 많이 다른가요?
A. 척 팔라닉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의 결말은 소설과 차이가 있습니다. 원작 소설은 주인공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것으로 끝나는 반면,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는 건물이 폭발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두 매체를 비교해서 보는 것도 흥미로운 방법 중 하나입니다.
Q. 파이트 클럽 상영 시간이 얼마나 되나요?
A. 파이트 클럽의 러닝 타임은 약 139분으로, 2시간 20분 정도입니다. 길다면 긴 편이지만, 전반부와 후반부 분위기가 꽤 달라서 지루하게 느껴지는 구간은 생각보다 적었습니다. 집중해서 보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보는 걸 권합니다.
결론
파이트 클럽은 제목이 주는 인상과 실제 영화 사이의 거리가 꽤 멉니다. 싸움보다 불면증, 해리성 정체감 장애, 타일러의 모순이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타일러처럼 살고 싶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닙니다. 주인공처럼 사는 것도 싫고,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그것도 좀 곤란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한 번 더 볼 생각입니다. 무슨 대단한 뜻을 찾으려고가 아니라, 반전을 알고 나서 처음부터 타일러가 등장하는 장면들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아직 못 보셨다면 타일러의 말이 멋있게 들리는 순간과 그게 불편해지는 순간이 어디인지 직접 확인해보시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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