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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로젝트 헤일 메리 (기억상실, 아스트로파지, 로키)

작은취향 2026. 9. 29. 18:53

목차


    영화 속 그레이스 박사는 깨어나는 순간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모릅니다. 옆엔 죽은 동료들, 창밖엔 낯선 별. 그런데 이 기억상실은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상태였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영화를 다시 보는 기분이 됐습니다. 과학 이야기가 많은 영화인데, 결국 제 머릿속에 남은 건 돌처럼 생긴 외계인 한 마리였고요.
     

    기억상실과 아스트로파지 — 설계된 상황들

    그레이스의 혼수상태는 성간 여행에서 흔히 쓰이는 동면(hibernation)과는 다릅니다. 여기서 동면이란 장거리 우주여행 중 신체 대사를 극도로 낮춰 생존하는 방식을 말하는데, 헤일 메리 프로젝트의 경우는 목적이 달랐습니다. 과거 소련의 밀폐 환경 모의 훈련에서 승조원들이 장기 격리 끝에 폭력적으로 변한 기록이 있었고, 그 전례를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혼수상태를 유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혼수상태에서 멀쩡히 깨어날 수 있는 사람은 7,000명에 한 명꼴이었습니다. 특정 DNA 조합을 가진 사람만 생존 가능성이 있었고, 거기에 해당하는 인물 중 야오 선장, 일류키나, 마틴 뒤브아, 그리고 그레이스가 선발됐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처음으로 '이 사람들 정말 죽으러 가는 거구나' 하는 감각이 왔습니다.

    더 걸렸던 건 그레이스가 애초에 탑승을 거부했다는 사실입니다. 실험실 폭파 사고로 다른 후보 과학자들이 전부 사망하면서 유일한 선택지가 됐는데, 그 사고 자체가 스트라트의 계획이었을 수 있다는 가설도 있습니다. 영화에서 명확히 밝히진 않지만, 스트라트의 성격을 따라가다 보면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스트라트를 처음엔 그냥 냉정한 관료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엔 이 사람이 어디까지 계획한 건지 알 수 없다는 게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스트라트가 그레이스에게 쓴 약물은 선택적 기억억제제(selective amnestic agent)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선택적 기억억제란 상황 인식과 과거 기억만 차단하고, 언어 능력이나 전문 지식, 습득한 기술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방식입니다. 몇 주 후면 기억이 돌아오도록 설계되어 있어 임무 수행에 지장이 없다는 판단이었지요. 결국 그레이스가 강제로 태워진 사람이었다는 기억이 돌아오는 장면에서 저는 꽤 오래 멈췄습니다. 앞에선 당연히 자원한 사람인 줄 알고 봤으니까요.

    한편 지구를 위협한 존재인 아스트로파지(Astrophage)는 '별을 죽이는 미생물'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스트로파지란 태양 에너지를 흡수해 금성으로 이동, 이산화탄소가 풍부한 환경에서 번식한 뒤 다시 태양으로 돌아오는 순환 구조를 가진 단세포 생명체입니다. 이 생명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태양 에너지를 빼앗고, 결국 지구에 빙하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E=mc² 공식으로 설명되는 에너지-질량 변환을 100% 손실 없이 구현하는 생명체였고, 이 능력 덕분에 헤일 메리호가 광속에 근접한 비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스트로파지를 지구에서 5년간 배양해도 편도 여행에 필요한 200만 kg이 고작이었습니다. 왕복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양이 필요했고, 인류 멸종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하면 왕복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구조였습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냥 설정이려니 했는데, 나중에 그레이스가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받아들이는 장면을 보고 나서야 이 수치가 얼마나 잔인한 전제인지가 실감 났습니다.

    • 그레이스의 기억상실은 사고가 아니라 스트라트의 의도적 설계
    • 아스트로파지는 E=mc² 수준의 에너지 변환이 가능한 생명체로, 헤일 메리호의 광속 비행을 가능하게 한 핵심 연료
    • 편도 여행은 처음부터 왕복이 불가능한 자원 계산 위에서 설계됨
    • 스트라트는 임무 성공 후 자신이 감옥에 갈 것을 알면서도 프로젝트를 밀어붙임
    요약: 기억상실부터 편도 여행까지, 그레이스가 처한 모든 상황은 누군가의 계산 위에 놓여 있었다.

     

    로키와의 우정 — 돌아온 선택의 의미

    로키가 처음 등장했을 때 솔직히 저는 '저 생김새로 두 시간을 어떻게 함께하나' 싶었습니다. 에리드(Erid) 행성은 지구보다 대기압이 29배나 높고 지표 온도가 200도를 넘습니다. 여기서 에리드란 타우세티 항성계에 속한 로키의 고향 행성으로, 극한 환경 때문에 로키의 종족은 암석 질감으로 진화했고 산소 대신 암모니아로 호흡하며 혈관에는 액체 수은이 흐릅니다. 빛이 없는 환경에서 살아온 탓에 안구가 발달하지 못했고, 박쥐처럼 초음파로 주변을 인지합니다.

    그런데 이 생명체가 그레이스와 음파로 말을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결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변화를 느끼게 된 결정적인 장면은 둘이 과학 문제를 함께 풀 때였습니다. 복잡한 공식 앞에서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어느 순간 친구 둘이 책상 앞에 앉은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로키는 290세였고 타우세티에 46년간 혼자 고립되어 있다 그레이스를 만났는데, 반가움에 헤일 메리호를 따라다녔다는 배경을 알고 나서는 그 감각이 더 짙어졌습니다.

    로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흥미로운 우연이었습니다. 로키 행성 승조원 20여 명은 방사선 노출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여행 중 전부 사망했는데, 로키 혼자 살아남은 이유는 잡식성 미생물인 아스트로파지가 방사선 물질까지 흡수한다는 점, 그리고 로키가 마침 연료탱크 주변에 살고 있었다는 점이 맞아떨어진 결과였습니다. 설계된 생존이 아니라 우연이 쌓인 생존이라는 게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타우메바(Taumeba)는 아스트로파지의 포식자입니다. 여기서 타우메바란 타우세티 항성계에서 아스트로파지를 먹이로 삼아 에너지를 빼앗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는 미생물로, 이 생명체를 지구에 보내면 아스트로파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임무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배양 과정에서 타우메바가 질소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며 제노나이트(xenonite) 입자 사이로 숨는 방법까지 터득해 탈출하고 맙니다. 여기서 제노나이트란 로키 종족이 만드는 특수 소재로, 로키의 우주선 전체가 이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타우메바 유출을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지구로 가던 방향을 돌렸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예상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갔습니다. 애초에 죽으러 가기 싫다고 했던 사람이, 이번엔 자기 발로 돌아가는 거니까요. 처음부터 영웅이었던 사람의 희생이 아니라, 도망가고 싶었던 사람이 그 순간만큼은 두고 갈 수 없다고 판단한 선택이었습니다. 저는 그 차이가 이 영화에서 제일 오래 남았습니다.

    결말에서 그레이스가 에리드 행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처음엔 웃겼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또 선생님이라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레이스가 원래 제일 좋아했던 것도 가르치는 일이었고, 로키 행성의 강한 중력과 시간 차이로 급격히 노화된 신체로 지구까지 돌아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지구로 돌아가는 것만이 좋은 끝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구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직접 못 보는 건 솔직히 좀 아쉬웠습니다.

    요약: 로키와의 관계가 그레이스를 바꿨고, 그 변화가 결말의 무게를 결정했다.

     

    자주 묻는 질문

    Q. 그레이스는 왜 기억을 잃고 깨어났나요?

    A. 스트라트가 그레이스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운 것입니다. 그레이스가 강제로 탑승된 사실을 알면 임무를 망칠 수 있다고 판단했고, 상황과 과거 기억만 지우는 선택적 기억억제 약물을 투여했습니다. 이 약물은 언어나 전문 지식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며, 몇 주 후 기억이 자연스럽게 돌아오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Q. 아스트로파지가 왜 지구에 위협이 되나요?

    A. 아스트로파지가 태양 에너지를 흡수해 번식하는 과정에서 개체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지구로 도달하는 태양 에너지가 급격히 줄어듭니다. 결국 지구 전체가 빙하기에 접어들어 인류가 멸종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악의 없이 번식만 하는 미생물이 결과적으로 별을 죽이게 되는 메커니즘입니다.

     

    Q. 헤일 메리 프로젝트는 왜 편도 여행이었나요?

    A. 5년간 지구에서 배양할 수 있는 아스트로파지의 양이 편도 여행에 필요한 200만 kg이 전부였습니다. 왕복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연료와 식량 운반 에너지가 필요했고, 인류 멸종까지 남은 시간 안에 왕복 물량을 확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Q. 로키는 왜 혼자만 살아남았나요?

    A. 로키 종족은 방사선에 취약한데, 로키는 우연히 연료탱크 근처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스트로파지가 잡식성 미생물로 방사선 물질까지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 로키를 방사선으로부터 보호했고, 이 우연이 겹쳐 혼자 살아남은 것입니다. 설계된 생존이 아니라 두 가지 우연이 맞아떨어진 결과였습니다.

     

    Q. 그레이스는 왜 지구로 돌아가지 않고 에리드 행성에 남았나요?

    A. 타우메바 유출로 로키가 위험해지자 귀환 연료를 소모하며 로키를 구했고, 이후 연료와 식량 부족으로 지구 귀환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여기에 더해 에리드 행성의 강한 중력 속 오랜 시간으로 신체가 급격히 노화되어 물리적으로도 왕복이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그레이스는 남은 시간을 에리드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며 보내기로 선택했습니다.

     

    결론

    제가 이 영화에서 제일 오래 생각한 건 지구를 구한 과학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가기 싫었던 사람이 왜 결국 로키에게 돌아갔는가, 그 질문이었습니다. 스트라트의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도 딱 잘라 말하기 어렵고, 그레이스가 에리드에 남은 게 비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결말이 꼭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감각이 남았습니다.

    SF 영화에서 과학 설명이 많으면 보통 거리가 생기는데, 이 영화는 그 틈을 로키가 메워줬습니다. 아스트로파지의 에너지 변환 원리나 타우메바의 생태가 궁금하다면 나무위키 프로젝트 헤일 메리 원작 소설 항목을 함께 보시면 영화에서 생략된 부분들이 채워집니다. 원작 소설은 앤디 위어(Andy Weir)가 집필했으며, 작가 공식 사이트에서 관련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화가 흥미로웠다면 원작을 읽는 게 후회 없는 선택일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엔 영화 본 다음 날 바로 소설을 주문했으니까요.

    참고: https://youtu.be/MEOL2uR83AE?si=dge0vnC4pkQWbyO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