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보다 더 무서울 수 있을까요. 영화 〈잠〉을 보기 전까지는 저도 그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수면 중에 이상 행동을 반복하는 이야기인데, 의학적 진단과 무속적 해석이 끝까지 팽팽하게 맞서며 관객을 어느 쪽에도 완전히 착지시켜 주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스릴러 정도로 생각했다가 자려고 누운 뒤에도 영화 장면이 떠올라 꽤 당혹스러웠습니다. 렘수면행동장애, 공포의 시작은 진단명이었습니다영화 초반에 남편 현수가 받는 진단이 렘수면행동장애(RBD, REM Sleep Behavior Disorder)입니다. 여기서 RBD란 수면 중 근육이 마비되어야 하는 렘(REM) 단계에서 오히려 몸이 움직여버리는 신경계 이상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꿈속에서 하는 행동이 실제 몸으로 그..
재난 영화라고 해서 지진 장면이 쭉 이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기억에 남는 건 무너진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멀쩡하게 남아 있던 아파트 안에서 사람들이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이 훨씬 오래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영화가 묻는 건 "재난 때 어떻게 살아남을까"가 아니라 "살아남은 뒤 어떤 사람이 되는가"였다는 겁니다. 재난이 벗겨낸 인간 본성의 민낯영화 초반, 대지진으로 서울 전체가 붕괴되고 오직 황궁 아파트 한 채만 남는 설정은 처음에는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면서 흥미로웠던 건, 이 설정이 오히려 굉장히 효율적인 실험 장치라는 점이었습니다. 사회 시스템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 한정된 공간과 자원만 남겨두면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압축해서..
영화 곡성에는 악마, 무당, 신, 형사라는 네 인물이 등장하며 관객은 끝까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판단하지 못합니다. 저도 처음엔 귀신 영화겠거니 했다가, 보고 나서 한동안 그 찝찝함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인물 분석 — 이 영화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이유곡성을 처음 볼 때 저는 종구를 그냥 따라가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경찰이고,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고, 감정적으로도 이해가 가는 인물이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사람의 판단을 따라가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네 인물의 구조는 이렇습니다. 무당 일광은 악령 퇴치를 의뢰받은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악의 하수인입니다. 죽은 사람들의 사진을 보관하고 종구 가족을 카메라에 담는 장면은 단순한 ..
솔직히 이번에도 결국 마석도가 다 때려잡겠지 싶었습니다. 범죄도시가 벌써 4편이니까요. 근데 막상 사전 시사회에서 보고 나니 그 예상이 맞긴 맞았는데, 이상하게 주먹 한 방 제대로 들어갈 때마다 또 시원하더라고요. 시리즈 누적 관객이 천만을 넘어선 프랜차이즈가 4편까지 오면 뭔가 달라졌을지, 아니면 그냥 그 공식 또 반복인지 — 제가 직접 보고 느낀 걸 정리해 봤습니다. 범죄도시 시리즈, 4편까지 오면서 뭐가 달라졌을까범죄도시 시리즈를 편별로 비교해보면 생각보다 각 편의 색깔이 꽤 다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매긴 재미 순위는 1편, 2편, 4편, 3편 순입니다. 1편이 가장 앞에 오는 건 그냥 향수 때문만은 아닙니다.1편은 필름 느와르(Film Noir)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필름 느..
솔직히 처음엔 그냥 오래된 사건을 극화한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실화 기반이라고 하니까 '1974년 8월 15일에 있었던 일을 다시 보여주는 거겠구나' 정도로 앉았거든요.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제가 제일 먼저 한 게 검색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사건을 직접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단순한 재현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실화에 대한 태도 — 이 영화는 어디까지 주장하는가영화는 시작과 끝에 두 개의 자막을 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디테일은 허구'라는 문구로 열고, '유경수 여사를 관통한 탄피는 공개되지 않았다'는 문구로 닫습니다. 이 두 문장 사이의 거리가 이 영화가 취하는 태도를 꽤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느꼈습니다.제가 중반까지는 꽤 몰입해서 봤습니다. 총성이 몇 번이었..
솔직히 저는 시즌2를 처음 볼 때 시즌1보다 무조건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판이 커졌으니까 당연히 더 긴장감도 크겠지 싶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고요. 보는 내내 현빈보다 우도환이 눈에 밟혔고, 결말은 두 번 생각해야 뭔가 남는 드라마였습니다. 인물 분석: 커진 판만큼 커진 균열시즌2는 피카레스크(picaresque) 장르의 특성을 가장 짙게 드러낸 시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피카레스크란 도덕적으로 흠이 있는 주인공이 사회 권력 구조 안에서 살아남으며 벌이는 이야기 구조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악인인데도 응원하게 되는 그 묘한 감정을 드라마가 의도적으로 끌어내는 방식입니다. 시즌1에서도 그 맛이 있었지만, 시즌2는 백기태가 이미 권력 상층부에 올라간 상태에서 시작하기 때..